용산은 고려 말 몽고군의 병참기지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로 이용되었으며,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조선지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해방과 함께 미24군단 예하의 미제7사단이 일본군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산기지는 미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외국군 주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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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에서의 용산 (출처:도성도,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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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형의 만초천과 조화되는 부드러운 둔지산의 능선
- 조선시대 만초천(蔓草川:덩굴내)은 자연스러운 선형이었으며, 당시 경관은 용산팔경(龍山八景)의 3경에 '만천해화(蔓川蟹火: 만천의 게잡이 불빛)' 로도 표현되었다. 만초천은 '무악천(毋岳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인왕산 옆의 '무악'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 둔지산은 남산에서 부어현(夫於峴)과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세를 지녔다.
개항기
용산의 개시장(開市場) 지정과 주변 일본인 거주 증가
- 1883년 주한일본공사는 구용산(舊龍山: 원효로 3가와 4가) 일대가 양화진보다 도성과 가깝기 때문에 거주와 통상이 유리함을 들어 개시장(조선 후기 대외무역시장)으로 개방하였고, 이로 인하여 용산 일대에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거주가 증가하였다.
일제 강점기
청일전쟁(1894년)시에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했고, 러일전쟁(1904년)시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와 20사단이 주둔하여 용산은 일제의 병참기지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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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내 군사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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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시설의 용산 이전
- 1904년에 한국주차군사령부는 한일의정서 제4조 규정을 근거로 용산 일대 115만평을 강제 수용한 후 토지 매매를 일체 정지시키고 위수지역으로 선포하였다.
- 1906년에서 1918년까지는 군사시설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었고, 1906년에는 연병장에서 한강통에 이르는 대로와 삼판통(三坂通)에서 계행사에 이르는 주요 도로가 완성되었다. 세부도로는 군사시설 용도에 따라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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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04월 사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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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04월 보병여단사령부청사, 09월 육군위수형무소(위수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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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01월 보병 78연대 병영,
07월 한국주차사령부,
09월 한국주차사령관사,
09월 위수병원,
10월 사단장 관사,
11월 육군창고,
11월 용산병 기지창,
12월 사단사령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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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06월 한국주 차군 사령부를 조선군 사령부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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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철도와 철교 (출처:독립기념관 소장, 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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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철도 부설 (출처:독림기념관 소장, 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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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 교량과 경인 철도 부설 : 일본의 경성 진출 교두보 역할
- 총독부가 1897년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鐵道引受組合)을 결성하여 미국인 제임스 모오스가 따낸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도받았다.
- 인천-용산-한성을 연결하는 군사상 목적의 침략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1900년 7월 최초의 근대식 교량으로 한강철교를 준공하였다.
해방 이후 -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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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용산전경 (출처: 개인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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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해방과 함께 미24사단은 일본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산에 정착하였다.
- 미군의 용산 점유는 서울 시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군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원조물자와 미8군 무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대중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미군부대 주변 지역에 화랑가가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