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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 버스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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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우스포스트 벙커

    01. 사우스포스트 벙커

    SOUTH POST BUNKER

    현재 한미연합군사령부 군사시설로 사용중인 사우스포스트 벙커는 용산기지의 남서쪽에 위치해 일제강점기 일본군사령부 작전센터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지배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조선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는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식민지배의 양대 기둥으로 이 곳에서 군사령관으로 재직했던 하세가와, 미나미, 고이소 등은 조선총독이 되기도 했다.
    사우스포스트 벙커는 광복 이후 미7사단사령부가 사용(1945. 9~1948. 12)하다가 주한미군이 철수한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작전실(1949. 7~1950. 6)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쟁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점령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한 때 박정희, 김종필, 장도영, 김백일, 채병덕 등 한국현대사의 궤적을 남긴 인물들이 거쳐갔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6·25전쟁 발발 당시 한강다리 폭파 결정도 이 일대에서 이루어졌다(당시 국방부 및 육군본부는 옛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 건물을 재활용해 사용했음).
    공원계획에서는 현재 원형을 최대한 보존할 계획이며 창이 없는 벙커 모양의 저층부는 문화시설 등으로, 창문이 많은 최상층은 방문자 센터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용산총독관저 터

    02. 용산총독관저 터

    주한미군 121 종합병원

    주한미군 121병원(2019.11 평택 이전)이 있던 이곳은 일명 ‘용산아방궁(龍山阿房宮)’으로도 불렸던 용산총독관저가 위치했다. 용산총독관저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사령관으로 부임해 제2대 조선총독까지 오른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러·일전쟁 잉여금으로 건설한 유럽풍의 초호화 건축물이었다.
    처음에는 하세가와 본인을 위한 일본군사령관 관저로 지은 것이었으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용산총독관저로 용도 변경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7사단 위관장교 숙사로, 1949년 7월 주한미군 철수 직후에는 미군사고문단(KMAG) 장교 클럽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파괴된 채로 방치됐다. 그 후 1950년대 후반 미군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다.
    공원계획에서는 기존 121병원을 해체하고 총독관저터와 그 앞에 위치했던 정원을 복원하고 그 주변으로 문화시설과 수경시설을 배치할 계획이다.

  • 용산위수감옥

    03. 용산위수감옥

    龍山衛戍監獄

    용산위수감옥은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둔지산 자락에 위치해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군 감옥으로 1909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감옥(형무소)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이후에는 미7사단 구금소로 사용됐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1949년 7월 대한민국 국방부가 용산기지에 자리잡으면서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사용되면서 군 감옥의 기능과 역할이 이어졌다.
    현재까지 감옥을 둘러싼 벽돌담장과 일부 건물들이 당시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며, 용산총독관저 터(121병원 부지)와 함께 사우스포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감옥 담장에는 6·25전쟁 당시의 탄흔이 그대로 남아있어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원계획에서도 위수감옥의 역사를 전시하는 용도를 포함한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둔지산

    04. 둔지산

    屯之山

    위수감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둔지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둔지산은 용산기지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약 70m)으로 남산에서 이어지는 지맥의 일부다.
    예부터 한강을 지키는 군부대가 둔(屯)을 치고 있는 곳이라서 ‘둔지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평지 가운데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둔지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둔지산 자락에는 우리 선조들의 마을인 둔지미(둔지리)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06년부터 둔지산 일대를 군사기지화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2차례에 걸쳐 강제 이주당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옛 기록에는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고 하여 둔지산에 하늘 제사를 지냈던 원단과 기우제를 지냈던 풍운뇌우단(일명 남단) 등 여러 종류의 단(壇)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미8군사령부

    05. 미8군사령부

    EUSA·EIGHTH UNITED STATES ARMY

    미8군사령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보병병영을 재활용한 것으로 1978년 맞은 편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되기 전까지 유엔군사령부(UNC)·주한미군사령부(USFK)·미8군사령부(EUSA)가 함께 있었던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다. 주한미군의 상징인 미8군사령부(EUSA)는 1944년 6월 10일에 미 본토에서 창설되었다. 미8군사령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배치돼 인천상륙작전 후 38선을 넘어 북한으로이동했다가 전황의 변화에 따라 1951년경 옛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에 자리잡았다.
    전쟁 중인 1952년 미8군은 한국근로단(KSC)을 배속받아 용산기지 복구 및 재건 공사를 개시하면서 구 일본군 78연대 병영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재활용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9월 15일 미8군사령부는 옛 서울대 건물을 반환하고 용산기지로 이전했다. 1954년 11월 미8군사령부는 미8군전방사령부를 용산기지에 남겨두고 일본 도쿄 근교의 캠프 자마로 이동했다. 이듬 해 1955년 7월 미8군사령부는 다시 용산기지로 복귀하고 미8군사령관이 겸직하는 미극동육 군사령부도 같이 서울로 따라왔다. 대신 일본 캠프 자마에 있던 미8군사령부는 미8군 후방사령부로 격하됐다. 미8군사령부가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용산으로 복귀한 이유는 당시 냉전시대의 동아시아 거점으로 용산기지의 군사전략적 비중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1957년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에 따른 미군재편이 이루어지는데 하와이에 태평양통합사령부(PACOM)를 창설하면서 일본에 있던 미극동군사령부(Far East Command)가 해체된다. 이에 따라 용산기지의 미극동육군사령부가 해체되고 주한미군사령부(USFK)가 새롭게 신설된다. 결국 1957년 7월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UNC)마저 도쿄에서 용산기지로 이동하면서 용산기지는 그야말로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핵심기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미8군사령부는 6·25전쟁의 주력부대로 용산기지에 주둔하면서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대한민국 안보의 한 축으로 기능해 왔다. 1944년 창설 이래 부대 역사의 대부분을 용산에서 보낸 것은 미군역사상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한미군사관계의 역사는 곧 미8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한미군기지 이전 및 재배치에 따라 지난 2017년 7월 미8군사령부는 평택으로 모두 이전했다. 이로써 6·25전쟁 이래 반세기 넘게 용산기지에 주둔했던 미8군사령부도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되었다.

  • 한미연합군사령부

    06. 한미연합군사령부

    CFC : 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한미연합방위태세의 심장부로 한미 부대를 통합지휘하기 위해 1978년 11월 7일에 창설되었다. 이로써 1960~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력이 신장되면서 한미군사협력과 유대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미연합사 창설로 한국군이 작전통제권 행사에 참여하면서 장래 전시작전권 환수를 위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평시작전권은 1994년에 환수함).
    한편, 한미연합군사령부 건물 뒷편에는 남산 자락의 이태원에서 발원해 삼각지쪽으로 흐르는 만초천 지류가 남아있다. 만초천 지류 한 가운데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보병 연대 정문으로 사용됐던 보행다리와 정문 기둥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건물은 1970년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건물로 지붕은 한국전통 기와를 사용하고 벽체는 콘크리트 형태로 구성돼 1970년대 한국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공원계획에서도 건축물의 외관을 최대한 유지하고 건물 뒤편 만초천 지류의 보행 다리와 돌기둥에서 진입이 가능한 통로를 만들 계획이다.

  • 조선시대 만초천 지류

    07. 조선시대 만초천 지류

    蔓草川 : 덩굴내

    만초천(덩굴내)은 원래 인왕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돼 한강으로 흐르는 약 7.7km에 이르렀던 큰 하천이었다. 1960년대 복개가 진행되어 지금은 거의 볼 수 가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용산미군기지 내에 복개되지 않은 상태로 약 300m 구간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용산미군기지 내에 남아있는 만초천은 엄밀히 말해 남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돼 삼각지 부근의 만초천 본류와 만나는 지류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조선시대 만초천에는 ‘만초(蔓草)’라는 풀이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덩굴내’라고도 불렀다. 고려말 목은 이색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용산팔경’ 가운데 만초천의 게잡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통해 예전 용산 만초천에서는 밤에 불을 켜고 많은 사람들이 게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태종 태에는 만초천 물줄기를 이용해 용산강(지금의 한강 원효대교 인근)까지 들어오는 배를 남대문까지 끌어 올리기 위한 논의도 이루어졌었다. 용산강으로부터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만초천에 군사 1만명을 동원해 운하를 건설함으로써 물자를 남대문에서 도성으로 손쉽게 운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많은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했다. 만초천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명칭으로 욱천(旭川)으로도 불렸다. 1990년대 중반 일제식 용어를 바로잡으면서 욱천을 만초천으로 변경했다.
    1960년대부터 복개공사를 시작하여 현재는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어 용산기지에 남아있는 만초천 지류는 옛 자연과 생태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연문화유산이다. 흐르는 물 위로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와 석축 등이 남아있어 조선시대 옛 만초천의 물길을 상상할 수 있다.

  •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08.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JUSMAG-K(JOINT U.S. MILITARY AFFAIRS
    GROUP-KOREA)·옛 일본군 장교숙소

    현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은 원래 용산기지 내 일본 육군 장교들이 머물렀던 장교숙소로 1908년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줄곧 일본군 장교숙소로 사용되다가, 해방 직후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단의 수행원들이 머무르기도 했다(소련군대표단 고위층은 조선호텔에 머무름).
    6·25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5년 대구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와 미군사고문단(KMAG)이 용산으로 이동한다. 이 때 육군본부는 현 전쟁기념관 부지에 자리를 잡았고 미군사고문단은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옛 일본군 장교숙소(미소공위 당시 소련군대표단 수행원 숙소)를 미군사고문단 본부로 사용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989년 대전 계룡대로 이전하며 그자리에는 현재의 전쟁기념관이 들어섰고, 미군사고문단(KMAG)은 국군의 성장과 발전에 비례해 그 역할이 점차 축소되면서 1971년 주한 미합동군사원조단(JUSMAG-K)으로 통합되었다.

  • 舊 병기지창 무기고

    09. 舊 병기지창 무기고

    兵器支廠 武器庫

    병기지창은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던 곳으로 인근의 육군창고(현 캠프킴 부지)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주한미군 역사실에서 발간한 『Historical Walking Tour of Yongsan Garrison(2008)』에 따르면 병기지창 일대 일부 건물은 일제 말(1944~1945) 보충대 막사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용도가 변경된 이유는 1908년 용산기지 완공 당시부터 줄곧 병기지창으로 사용되다가 1943년초 용산기지의 일본군 부대가 대거 뉴기니아 전선으로 차출되면서 이른바 ‘뿌리뽑기 강제동원’에 의해 수많은 한국청년들이 보충대로 강제동원되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일대는 주한미군 공병대와 시설대가 사용 중이다.
    사진에서 보듯 1908년 완공된 병기지창 병기고(兵器庫=무기고) 건물은 현재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주한미군 사병막사로 이용되었다.
    공원계획에서는 병기지창 일대의 배치구조를 복원할 수 있도록 마당을 계획하고 건물은 증축된 부분을 철거하고 원형을 회복할 계획이다.

  • 남단(추정)

    10. 남단(추정)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남단(풍운뇌우단)은 조선시대 한양도성 내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과 더불어 한양 도성 밖 성저십리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제례시설로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곳이다.
    조선시대 묘와 단은 유교이념 아래 국가가 설치 운영하는 신성한 곳이었으며, 백성의 풍요와 사회의 안위를 희망하는 이념의 장치였다. 개혁군주 정조(正祖)는 이 남단을 예전 하늘에 천지 제사를 지냈던 원구단(원단)으로 보고 남단의 장소를 재정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구단(원단)과 남단(풍운뇌우단)은 별도의 단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원래 ‘산천단(山川壇)’으로 불렸는데 1406년 숭례문 밖 목멱산 남쪽(둔지산)으로 옮겨졌고, 1411년 5월 ‘풍운뇌우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537년 4월 중종은 남단(풍운뇌우단)에서 직접 기우제를 지내고 이후로도 역대 임금들이 남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당시 기우제는 3~5일간의 간격을 두고 목멱산, 용산강, 사직과 종묘 등 여러 곳에서 12차례까지 지냈다.
    그 후 남단은 1906~1908년 일본군 병영 조성과정에서 훼손되었고 현재는 유구로 추정되는 일부 석물만이 남아있다. 1937년 발행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엔 “용산중학교 동쪽에서부터 뻗은 작은 언덕 줄기를 따라 내려와, 현재 야포 병영 가운데 돌출한 부위의 남쪽 끝에는 예부터 남단이 설치돼 있었다… 그래서 이 언덕길을 남단고개라 부른다”고 나와 있다.
    공원계획에서는 정밀 발굴 조사 및 원지형을 회복하고 현재 구릉지에 남아있는 남단 유구(추정)를 보존할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 드래곤 힐 호텔과 둔지산 느티나무

    11. 드래곤 힐 호텔과 둔지산 느티나무

    DRAGON HILL LODGE & ZELKOVA TREE

    용산기지 내 사우스포스트 둔지산 구릉에 자리잡은 드래곤 힐 호텔은 원래 남산과 한강을 배경으로 둔지산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던 우리 선조들의 ‘둔지미 마을’이 있던 역사적 장소다. 1908년경 일제의 용산기지 조성으로 마을주민들이 전부 쫓겨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이곳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관 관저(원래는 통감관저였음)가 들어섰고(현재도 호텔 입구에는 당시 관저 앞에 있던 초소와 석물들이 남아있음), 광복 후 주둔한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직후 이곳에 미8군클럽을 신축했다.미8군클럽은 한국대중음악의 산실이자 거점이기도 했다. 당시 미8군클럽에서 활동하던 한국가수들이 한때 한국가요계를 풍미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용산지원센터(Yongsan Support Center)’로 활용 중이다.
    한편, 드래곤 힐 호텔은 원래부터 용산기지 내에 있던 것은 아니며, 과거 미군전용 숙박시설이었던 종로구 사직동의 내자호텔(현 서울지방경찰청 부지)을 대신해 1980년대 말 미8군클럽 남쪽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드래곤 힐 호텔은 1987년 10월에 기공해 1990년 4월에 개장했다. 현재 4성급 호텔수준으로 394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